어느 한적한 곳



잔잔한 듯 경쾌한 노래가 자그마한 소극장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17시에 시작하는 연극이 아직은 시작하질 않아서 나오는, 끝난 듯 싶으면 이내 반복하는 배경음악이 자꾸만 내 주의를 환기시킨다. 공연장으로 오는 중에는 멀쩡했다가 갑작스레 드는 초조한 마음에 마른 세수를 반복했다. 꼭 쥐고 있던 양손을 풀었는데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다시 꼭 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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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한주이다. 그룹에서 랩을 담당했었고 운동신경이 좋아서 덤블링과 같은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안무와 종종 있었던 시구에서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교섞인 감각있는 말투로 팬들에게 사랑받는 그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그녀가 아닌 해나였는데, 어느샌가부터 그녀는 나를 해나오빠로 불러주었었다. 바빠진 나는 그들을 거의 만나러 가지 못했고, 몇 달 전 계약만료로 해나와 함께 그룹을 나오게 되었다.

해나는 아직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진 않아서, 너무 만나고 싶은데도 만날 수가 없었다. SNS에 올려지는 사진으로나마 그들이 자주 교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때마다 해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장난스레 주변 사람들은 이제 일반인이니 연락해보라는 말에 혹 하기도 했었다. 너무 그리웠고 그립고 지금도 보고싶어서, 해나와 찍은 사진을 전화기 배경화면으로 해두는 것으로, SNS에 이름을 뺀 그저 보고싶다는 한마디를 올리는 것으로 보고싶은 마음을 그나마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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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활동할 때는 단발이었다가 이제는 머리를 많이 길러서 미모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한주가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기 직전이다. 사실 지금 내가 손이 떨릴만큼 초조하고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쩌면 해나와 그녀의 이어진 그 끈이 우연히 내 발목에라도 걸릴 수도 있겠다는 터무니 없는 기대로 인한 것 일지도.

배경음악이 조금은 커진 음량으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여러 안내 멘트가 나오고 금새 암전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 찰나, 3초 아니 2초 정도만에 다시 켜진 무대 한편에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배우가 앉아서 대사를 읊어나갔다. 몇 번의 대사가 지나가고, 곧 그녀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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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암전이 되었다 밝아지며 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 차례의 등장에서 혹여나 나를 알아봤을까? 아니면 무대 조명 때문에 관객석은 보이지 않아서 나 또한 보지 못했으려나? 궁금한 마음이 잠깐씩 들긴 했지만, 내 지루한 일상과는 다른 약간 높은 감정선에 이내 다시 극에 몰입하게 되었다. 진지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내가 알던 귀엽기도 한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빠르게 뛰는 맥박이 역시나 난 그녀의 팬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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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막바지에, 핀 조명이 무대의 왼편을 비추었다. 그 곳에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있는 다른 배우가 앉아있었다. 이내 무대 오른편에 조명이 켜지고 그 곳에는 그녀가 앉아서 편지의 내용을 독백으로 풀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관객석 가운데 통로 바로 옆 두번째 줄에 앉아있었는데, 살짝 비틀어 앉아 관객석 중앙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편지는 극 중의 그녀가 말기암 판정을 받아, 외국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편지였다. 그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대사를 읊어나갔다. 눈을 마주친 그녀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 또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혹시나 나를 알아보았을까, 내가 보이는걸까 하는 물음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금새 그녀의 편지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우는 모습에 눈물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잘 참으며 바라보았다.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설렘과, 아직은 만날 수 없는 해나에 대한 답답한 감정이 겹쳐서 증폭된 것일까. 언젠가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며, 북받쳐오르는 감정에 그녀의 목소리가 더 떨려져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내 시야도 흐려졌다. 곧 핀 조명이 꺼졌고,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무대 왼편의 배우가 통곡을 하고, 이내 암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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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주시면 관계자가 사진을 찍어드릴겁니다!"
"배우분들과 포토타임을 갖겠습니다"

무대가 끝나고, 각자 짐을 챙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포토타임이 시작되었다. 사진을 찍으려 모두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준비한 케이크 봉지를 챙겼다. 공연 직전, 티켓을 교환하고 베이커리에 들러 사온 케이크였다. 온통 치즈 다이스로 둘러져 있는 치즈케이크와 딸기가 잔뜩 올려진 딸기타르트, 색 조합이 어정쩡한 초코케이크, 딸기 두어개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 중에서 어떤게 그녀가 좋아할만 했었던건지 떠오르질 않았다. 오늘 공연은 17시, 그러니까 오후 5시와 8시에 두 차례였고, 그 사이에 분명 밥을 먹고나서 혹은 끝나고 먹어도 괜찮을만한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를 골랐다. 선택장애인 내가 살아오며 택한 방법은 간단한 몇가지 근거로, 또 감각적으로 끌리는 것으로 빠르게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이후로 내 인생의 선택에서의 후회는 없었다.

"어?"

천천히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외마디 작은 외침과 함께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머, 어떻게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아마도 공연 중에 시선이 마주친 건, 검은 실루엣의 한 관객의 얼굴을 보고 몰입했었던 그녀였으리. 그녀들의 SNS를 모두 구독하고 있었기에 몇달 전부터 공연을 계속하고 있었던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잠깐의 눈인사를 나누고, 나는 잠깐 뒤로 빠져서 다른 관객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비켜있었고, 나도 곧 배우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손짓으로 오라고 해서 그녀를 옆에 앉히고 사진을 찍었다.

"더 찍으실 분 없나요?"

포토타임이 끝나고, 나는 다시 무대로 가서 그녀와 악수를 했다.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쥔 건 내 마음이 그래서 였던건지.

"지난 번에 친구랑 둘이 왔었는데, 그 때 관객이 우리 둘 뿐이라 공연 취소되고 그냥 갔었어요"
"아, 죄송해요"
"아녜요, 죄송할 것 까지야"

그 때는 트리플 캐스팅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왔다가 당연히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연 취소로 양해를 구하러 배우가 나왔었는데 그녀가 아니었었다. 그래서 그 때 그녀의 이름으로 스케줄을 물어봤었고, 그 날은 그녀가 무대에 서지 않는 날이었다. 그 때 이후로 극장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스케줄을 확인하다가 내 휴일과 맞는 오늘에서야 오게 된 것이었다.

"아, 정말 감사해요. 혼자 오신 거에요?"
"네. 오늘은 혼자 왔어요"
"근데 진짜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에이, 다 알죠"
"아, 감사해요 정말"

오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었다. 해나 얘기를 꺼낼까 말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데, 그녀를 보러 와서도 해나 얘기를 꺼내면 싫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 성격이 아닌 그녀와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공감대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둘이 사진 하나 더 찍어요!"

울어서 아직도 빨갛고 부은 눈이 눈에 띄었다. 이따가 저녁 공연에서도 온 에너지를 쏟아 울어야 하고, 몇달을 이렇게 해왔을거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더 예쁘게 사진을 남기고 싶지만, 당장 지금은 관계자가 찍어준 사진 말고, 그녀와 단 둘이 찍은 사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어색함 속에서 지금의 돌파구는 이것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다음에 또 봐요!"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할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래도 뭔가 후련한 느낌이 마치 가슴 속에 응어리가 한번에 풀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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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오늘 저녁에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도 잘 챙겨서 들고 왔지만, 공연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 보람을 챙길 새도 없게, 이미 한바탕하고 지나가버린 듯 바닥은 젖어있었고 비 온 뒤의 흙냄새가 퍼져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는데 이젠 춥지 않은 것을 보니 봄이 완연한게 맞았다. 만남과 공연의 여운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모퉁이에서 꺾기 직전,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밥 먹으러가요?"
"네, 저녁 먹으러가요"

나는 다시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다른 공연관계자도 같이 있기도 하여 조금은 속도를 붙여 걸어갔다. 식당들과 먹거리가 많은 쪽은 분명 저쪽이니, 나는 그 반대편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자 드는 생각이, 아까 분명히 해나 얘기를 할 걸, 했어야 했던건데, 소식이라도 물어봤어야 하는건데, 이런 후회가 밀려와 한겹씩 쌓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 얘기했어도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 무게가 무거웠던지, 터벅터벅 대는 소리가 점차 커지도록 걷게 되었다. 얼른 해나가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곳에 나도 찾아가서, 많이 보고 싶었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놓쳐버린 지난 날을 바보같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잡으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다른게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지. 그런 때가 오고 나서야 지금이 기회였다고 후회만 하고 있으려고 그런건지, 그럼에도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집으로 가서 더 생각해 볼 건지, 아니면 지금처럼 그리워 하기만 하면서 살 건지, 지금 결정해야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마음이 급해진건지.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보고싶다. 답답함이 가슴을 더욱 조여오고 있었다.

"해나님!"

분명 뒤에서 그녀가 부르는 소리였다. 그런데 해나오빠가 아니라서 좀 아쉽긴 하네.

"잘 가요!"

팔짝팔짝 뛰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에 나도 위로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았을 때, 나는 차분해졌다. 아마도 그 인사가 나에게는 진정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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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출발하여 터미널을 벗어난 버스는 소등을 했다. 자연스레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가, 엔진의 백색소음과 지금의 이 복잡한 감정들이 아직은 아니라며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멀미도 심하고 어제 밤에 잠도 못 잤는데, 그리고 늘 그랬던 습관처럼 눈이 감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어두워진 한강의 야경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더 휘젓는 듯 하다. 지금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인 이 설렘이, 그 동안 얼마나 느끼고 싶었던건지 그리고 내 무의식에 감동을 가져왔는지 어느새 내 눈가에는 아주 조금의 눈물이 흐를 듯 고였다가 이내 번져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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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2016.06.04 02:55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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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적한 곳

어서 와. 이런 곳은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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